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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만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mahler2 2011. 11. 16. 17:30
시작은 임수정이였다.
6년 전 2월 어느날 훌쩍 떠나버린 그녀 이후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되버린 임수정때문이다.
단지 그녀가 나온 영화라는 이유로 보게 되었다.
(사실 이때는 이 영화가 이윤기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달랐겠지만 지금은 네티즌들의 영화평이나 별점 같은거에 신경을 쓰고 주변 사람의 얘기에 의해 영화를 취사선택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임수정이 나온다는 점 때문에 보게 됐다. '김종욱찾기'보다 못하진 않겠지라는 기대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롱테이크컷... 그것도 고정카메라를 통한...
내러티브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현란한 카메라 워크에 길들여져 가던 나로써는 혼란스럽기도 하면서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정적인 영화였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과 느린 대사톤... 그리고 지속되는 고정 카메라 롱테이크샷... 게다가 간간히 보이는 롱샷까지...
작은 두근거림은 어느새 쿵쾅쿵쾅하는 심장박동소리를 내고 있었다.

압권은 임수정의 단독씬에서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며 하나씩 불을 켜는 동작... 인위적인 fade in 설정이였다.
2층 베란다를 가운데 두고 담배를 피며 서성거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였다.
고정된 카메라 속에서 베란다 창문을 가운데 두고 서성거리고 자연스럽게 화면 밖으로 나갔다가... 창문 유리를 통해 비춰지는 모습... 그리고 다시 화면 안으로...
마치 장 르느와르나 차이밍량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영화의 공간은 처음 10여분 자동차에서의 대화(고정 카메라 롱테이크)를 제외하고는 전부 집이라는 공간으로 집약된다.
등장인물들의 동선과 고양이의 동선까지... 그리고 전술했던 페이드 인 효과까지...
정말 잘 짜여진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 봤던 관금붕의 '레드로즈, 화이트로즈'에서의 화장실 신이 연상될 정도의 미쟝센 효과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몇몇 동작 외에는 카메라의 이동 없이도 감정의 흐름을 전달했다는 점이다. 사실 감정전달에서 가장 쉬운 방식은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굳이 극단의 핸드헬드카메라를 이용한 왕자웨이가 아니라도 적당한 카메라의 흔들림과 빠른 이동은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는데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계속 고정적인 시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현빈/임수정 모두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가 아니였음에도 감정 몰입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몇몇 동작과 장치들로 충분히 느낌을 전달해줬다.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가 좋아하던 영화라는 매체의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게 영화란... 더 이상 해석이나 감상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아니였다. 그리고 작가와의 혹은 주변인들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도 아니였다.
그저... 그저 내게 잠시간의 시간적 여유를 주는 엔터테이너로써의 역할 뿐이였다.

사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건 이 영화는 내가 예전에 얼마나 영화를 좋아했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었는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올려 줬다는 사실이다.
굳이 바쟁이나 아이젠슈타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methodology를 잊은 채 살아왔던... 나의 10년 넘은 세월에서 이 영화를 통해 갑작스럽게 페이드 인된 느낌이였다.




마지막으로 임수정의 '괜찮아. 다 괜찮아 질거야. 정말...'이라는 읖조림을 끝으로 올라가는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음악은... 놀랍게도... 이병우의 '비'였다.
고양이와 함께 영화의 가장 주요한 매개였던 비...
영화 내내 배경음악은 끊임없는 빗소리였는데...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음악이 이병우의 '비'라니...

나의 어린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줬던 '음악이 흐르는 밤에'의 정혜정이 그렇게 좋아하던 이병우 1집에 있는,
내가 엘피판이 부러질 정도로, 그걸 녹음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던,
그 1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인
비가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현실과 타협하던 나의 핑계는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난 아직도 영화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그 시절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0년간 냉동수면실에서 꿈을 꾸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난 여전히 그때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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